가을이 깊어갑니다.
흔히들 '천고마비의 계절이다',
또는 '등화가친(燈火可親)의 계절이다' 하면서 가을을 수확과 휴식의 계절로 여깁니다.
봄과 여름에 흘린 땀과 수고를 광주리 가득 담는 수확의 기쁨을 맛보며, 우리는 비로소 가을의 풍요로움을 느낍니다.
한자로 가을을 뜻하는 추(秋)자는 벼가 불 옆에 있는 모습을 형상화했으니, 어쨌든 수확과 풍요를 뜻하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하늘 높고 파란 가을, 풍성한 먹이에 말도 살찌는 계절, 가을.
붓이 있다면 이 가을을 무슨 색으로 그려야 할까요.
대부분 울긋불긋 단풍을 떠올리겠지만 우리 옛 조상들은 가을을 백색으로 표현했습니다.
백색이라면 겨울의 하얀 눈 색깔이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 조상들은 가을은 백색, 겨울은 검은색으로 표현했습니다.
백색은 서쪽을 뜻해서, 나이가 들면 검은 머리가 백발이 되듯 흰색으로 변하기 시작하는 때, 그때가 바로 가을입니다.
그래서 가을이면 단풍놀이에 마음이 들뜨기도 하지만, 고독, 쓸쓸함, 그리고 외로움이 가슴을 적시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춘여사 추사비(春女思 秋士悲).
'봄에 여인은 사랑에 설레지만 가을에 남자는 슬픔에 젖는다'라는 말입니다.
또다시 저무는 한 해를 보면서 이루어야 할 일은 못 이루고 속절없이 세월을 보내는 남자의 비감한 심정을 나타내는 구절입니다.
올 한 해 내가 무엇을 이루었는가.
다른 사람의 풍요로운 결실과 견주어 볼 때 보잘 것 없는 내 성과에 가슴 쓸쓸해지는 회한의 계절이기도 합니다.
올 한 해도 그렇게 흘러 어느새 서산에 해가 걸리는 가을의 저녁을 마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올가을에는 무엇을 생각해 볼까요.
등화가친의 계절이라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서점의 도서 판매량은 일 년 중 가장 낮은 시기가 가을이라고 합니다. 모두들 여행과 외출에 정신없이 바쁘기 때문이지요.
기상학적으로도 사계절 중 가장 짧은 계절이라는 가을,
곧 검은 겨울이 닥쳐올 백색 가을에는 무엇을 할까요.
가을갈이란 말이 있습니다.
다음 해의 농사에 대비해서 가을에 논밭을 미리 갈아두는 일입니다.
이 가을에 지나간 여름을 생각하면서 또 추운 겨울이 지나면 다가올 새로운 한 해를 상상하는 것은 어떨까요.
고단했던 지난 여름의 노고를 위로하고 거두어들인 풍요를 만끽하면서도 조용히 뒤를 돌아보며, 앞을 향해 나아갈 스스로를 추슬러 보아야 할 것 아닌가 합니다.
하얀 가을이 무르익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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